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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아이는 불안하다: 출국
웅진서가 | 15.05.28 | 조회수 2,918
“여보, 이제 떠날 날을 정해야지. 언제 출발하는 것으로 비행기 표를 끊을까?”
“글쎄, 몇 월에 떠나는 게 좋을까?”
연수를 떠나는 사람들은 언제 떠날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만일 출국 시점을 자의로 정할 수 있다면 나는 여름(6~8월)을 추천한다. 우리 가족은 8월에 출국했다. 미국 서부의 기후 좋은 도시로 간다면 상관이 없지만, 동부의 사계절이 뚜렷한 도시로 간다면 어느 계절에 출발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눈이 많이 오고 매섭게 추운 곳이라면 겨울에 떠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겨울에는 비행기가 제대로 이착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와 도시의 첫 인상이 좋으면 적응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수월하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 초반에는 돌아다니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날씨가 지나치게 춥거나 더우면 사람이 빨리 지쳐 버린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는 여름에 행사나 축제가 많아서 활기가 넘친다.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하면 자칫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우울해질 수 있는데, 정착하는 곳의 분위기가 밝고 쾌활하면 그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정서적 전염성은 새로운 환경에서 연약해진 사람의 마음을 특히나 좌지우지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여름에 입국하는 것이 좋다. 낯선 환경에서 학년 중간에 전학하는 것보다는 새 학년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응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여름은 이사철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유학생들의 이동이 가장 많은 시기다. 따라서 비행기 표가 비싸고 집을 구하기 어려우며 행정 처리가 지연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2012년 8월 15일 출국하고 나서 며칠간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공항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로 비행기 이륙이 한 시간 지연되었다. ‘시작부터 왜 이러지.’ 비행기 연착에 따른 파급 효과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지 행동 치료에서 환자들에게 주의시키는 파국적 사고가 이번엔 내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이다. 애틀랜타 공항에서의 환승 시간은 한 시간으로 짧아졌다.
비행기를 놓치면 미국에서의 첫날을 공항에서 보내야 할 판이었다. 가뜩이나 마음이 초조한데 애틀랜타 공항 입국 심사대의 대기 줄은 끝없이 길었다.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입국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환승 경로가 복잡하지 않아서 피츠버그 행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12kg의 배낭을 지고 묵묵히 따라와 준 아이들이 고맙기만 했다. 그러고 나니 또 새로운 걱정이 엄습했다. 피츠버그 공항에서 렌트할 미니밴에 우리의 수많은 짐이 다 실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단계 단계마다 새로운 도전과 걱정이 교차했다. 내 생애 그렇게 길었던 하루는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 피츠버그에 도착하기까지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했다. 솔직히 말하면 짐이 너무 많아 나 혼자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임무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노트북을 꺼내 놓아야 하는데, 노트북 세 대를 아빠가 전부 갖고 있다가 꺼내기는 어려우니까 각자 가방에 한 대씩 넣고 책임지도록 하자. 그리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면 맡은 것을 챙기자. 물건이 많으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해.”
이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아이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여정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미국에 가져갈 책이나 물건을 스스로 챙기게 하니, 아이들은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골랐다. 짐이 많아지는 것 같으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게 해서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정했다. 꼭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생각도 깊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타협과 협상의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일에 있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책임감을 부여한 것은 지금 돌아보아도 잘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끌려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매사를 결정해 주기보다 아이의 의사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면 나중에 딴소리를 하지 못하기에 부모는 오히려 편해진다.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하는 거니? 그래, 그럼 그렇게 정한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이렇게 정한 것은 나중에 뒤돌아보지 말자.” 이것은 우리 부부가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조이기도 하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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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웅진서가
내용 “여보, 이제 떠날 날을 정해야지. 언제 출발하는 것으로 비행기 표를 끊을까?”
“글쎄, 몇 월에 떠나는 게 좋을까?”
연수를 떠나는 사람들은 언제 떠날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만일 출국 시점을 자의로 정할 수 있다면 나는 여름(6~8월)을 추천한다. 우리 가족은 8월에 출국했다. 미국 서부의 기후 좋은 도시로 간다면 상관이 없지만, 동부의 사계절이 뚜렷한 도시로 간다면 어느 계절에 출발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눈이 많이 오고 매섭게 추운 곳이라면 겨울에 떠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겨울에는 비행기가 제대로 이착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와 도시의 첫 인상이 좋으면 적응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수월하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 초반에는 돌아다니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날씨가 지나치게 춥거나 더우면 사람이 빨리 지쳐 버린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는 여름에 행사나 축제가 많아서 활기가 넘친다.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하면 자칫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우울해질 수 있는데, 정착하는 곳의 분위기가 밝고 쾌활하면 그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정서적 전염성은 새로운 환경에서 연약해진 사람의 마음을 특히나 좌지우지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여름에 입국하는 것이 좋다. 낯선 환경에서 학년 중간에 전학하는 것보다는 새 학년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응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여름은 이사철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유학생들의 이동이 가장 많은 시기다. 따라서 비행기 표가 비싸고 집을 구하기 어려우며 행정 처리가 지연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2012년 8월 15일 출국하고 나서 며칠간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인천공항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로 비행기 이륙이 한 시간 지연되었다. ‘시작부터 왜 이러지.’ 비행기 연착에 따른 파급 효과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지 행동 치료에서 환자들에게 주의시키는 파국적 사고가 이번엔 내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이다. 애틀랜타 공항에서의 환승 시간은 한 시간으로 짧아졌다.
비행기를 놓치면 미국에서의 첫날을 공항에서 보내야 할 판이었다. 가뜩이나 마음이 초조한데 애틀랜타 공항 입국 심사대의 대기 줄은 끝없이 길었다.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입국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환승 경로가 복잡하지 않아서 피츠버그 행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12kg의 배낭을 지고 묵묵히 따라와 준 아이들이 고맙기만 했다. 그러고 나니 또 새로운 걱정이 엄습했다. 피츠버그 공항에서 렌트할 미니밴에 우리의 수많은 짐이 다 실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단계 단계마다 새로운 도전과 걱정이 교차했다. 내 생애 그렇게 길었던 하루는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 피츠버그에 도착하기까지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했다. 솔직히 말하면 짐이 너무 많아 나 혼자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임무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노트북을 꺼내 놓아야 하는데, 노트북 세 대를 아빠가 전부 갖고 있다가 꺼내기는 어려우니까 각자 가방에 한 대씩 넣고 책임지도록 하자. 그리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면 맡은 것을 챙기자. 물건이 많으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해.”
이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아이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여정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미국에 가져갈 책이나 물건을 스스로 챙기게 하니, 아이들은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골랐다. 짐이 많아지는 것 같으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게 해서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정했다. 꼭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생각도 깊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타협과 협상의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일에 있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책임감을 부여한 것은 지금 돌아보아도 잘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끌려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매사를 결정해 주기보다 아이의 의사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면 나중에 딴소리를 하지 못하기에 부모는 오히려 편해진다.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하는 거니? 그래, 그럼 그렇게 정한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이렇게 정한 것은 나중에 뒤돌아보지 말자.” 이것은 우리 부부가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조이기도 하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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