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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speaking
웅진서가 | 15.06.04 | 조회수 4,083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서는 비교적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발음도 좋은 편이었다. 영어는 별로 공부하지 않아도 시험 점수가 항상 잘 나왔다. 잘 모르는 문제는 감으로 대부분 맞힐 수 있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있었던 동생이 미국에 살면서 영어가 급격히 느는 것을 보고 나도 내심 이번 연수 기간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영어가 많이 늘기에는 짧았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말하는 것은 보통 돌 전후다. 만 2세에는 150~300 단어 정도를 사용하고 ‘엄마, 물!’ 이런 식으로 두 가지 단어를 조합해 말한다. 만 3세에는 500~1000 단어 정도를 구사하고 세 가지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큰아이가 2년 동안 사람들의 말을 듣고, 관찰하고, 모방한 것을 마치 다시 아기로 돌아가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다. 아이는 말을 배우면서 단순히 단어와 문장만 배우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지, 말하는 속도는 어떤지, 그때 무슨 표정을 짓는지, 말을 할 때의 자세와 태도를 관찰하고 모방하면서 말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나라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 생활 내내 느꼈다. 단어나 문장이 쉽고 어렵고는 상관이 없었다.
“How are you today?”
“Good.”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Good. How are you?” 이렇게 되물어주는 것이 예의다. 이때는 ‘you’에 강세가 있다.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Good’과 ‘How are you?’ 사이에는 0.1초의 간격도 없다. 이렇다는 것을 관찰해서 알기는 했지만 모방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통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혼자서 연습을 해도 정작 인사하는 상황이 되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감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오래 산 동생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잘 있어 보이면 그냥 ‘안녕’만 하면 되지, 왜 오늘 어떤지를 물어보고, 자신이 어떤지 상대방이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How are you?’라고 물어보면 대답은 대부분 ‘Good.’이잖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대체 왜 물어보는 건지 ……. 형식적이고 필요하지 않은 인사를 계속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어떨 때는 피곤하기도 해.”
동생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왜 이렇게 인사를 해야 하지?’라는 뭔지 모를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미국 사람과 비슷하게 “Good. How are you?”로 반응할 수 있기까지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사말부터 문화적인 차이가 나니 하물며 다른 것들은 어떻겠는가.

언젠가 내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하던 큰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해요? 제가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야. 아빠도 수없이 연습해. 네가 이렇게 프리젠테이션 리허설을 하는 것처럼 아빠도 회의에서 발표하기 전에 문장이 입에 익도록 연습을 해. 영어로는 임기응변을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예상 질문도 생각해서 답변을 미리 준비하지.”
“언제까지 이렇게 연습을 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 점점 익숙해지면 연습하는 횟수도 줄어들 거야. 처음에 10번 연습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5번, 2번으로 줄어들겠지. 그래도 너는 아빠보다 빨리 익숙해질 거야.”
이렇게 아이를 위로했다. 사실은 내 자신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1년 정도 살고 나면 아이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외국어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부모가 겪는 어려움을 아이도 똑같이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아닌 이상 2년을 살아도 의사소통은 여전히 큰 숙제다. 1년 정도 지나면 일상 대화를 알아듣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듣기’는 늘지만, ‘말하기’는 연습을 해도 생각처럼 빨리 능숙해지지 않는다. 듣기, 말하기 순서로 발달하는 언어 발달 과정과 똑같다. 듣기는 수동적인 수용으로 끝날 수 있지만 말하기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나 아이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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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웅진서가
내용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서는 비교적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발음도 좋은 편이었다. 영어는 별로 공부하지 않아도 시험 점수가 항상 잘 나왔다. 잘 모르는 문제는 감으로 대부분 맞힐 수 있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있었던 동생이 미국에 살면서 영어가 급격히 느는 것을 보고 나도 내심 이번 연수 기간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영어가 많이 늘기에는 짧았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말하는 것은 보통 돌 전후다. 만 2세에는 150~300 단어 정도를 사용하고 ‘엄마, 물!’ 이런 식으로 두 가지 단어를 조합해 말한다. 만 3세에는 500~1000 단어 정도를 구사하고 세 가지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큰아이가 2년 동안 사람들의 말을 듣고, 관찰하고, 모방한 것을 마치 다시 아기로 돌아가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다. 아이는 말을 배우면서 단순히 단어와 문장만 배우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지, 말하는 속도는 어떤지, 그때 무슨 표정을 짓는지, 말을 할 때의 자세와 태도를 관찰하고 모방하면서 말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나라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 생활 내내 느꼈다. 단어나 문장이 쉽고 어렵고는 상관이 없었다.
“How are you today?”
“Good.”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Good. How are you?” 이렇게 되물어주는 것이 예의다. 이때는 ‘you’에 강세가 있다.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Good’과 ‘How are you?’ 사이에는 0.1초의 간격도 없다. 이렇다는 것을 관찰해서 알기는 했지만 모방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통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혼자서 연습을 해도 정작 인사하는 상황이 되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감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오래 산 동생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잘 있어 보이면 그냥 ‘안녕’만 하면 되지, 왜 오늘 어떤지를 물어보고, 자신이 어떤지 상대방이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How are you?’라고 물어보면 대답은 대부분 ‘Good.’이잖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대체 왜 물어보는 건지 ……. 형식적이고 필요하지 않은 인사를 계속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어떨 때는 피곤하기도 해.”
동생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왜 이렇게 인사를 해야 하지?’라는 뭔지 모를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미국 사람과 비슷하게 “Good. How are you?”로 반응할 수 있기까지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사말부터 문화적인 차이가 나니 하물며 다른 것들은 어떻겠는가.

언젠가 내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하던 큰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해요? 제가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야. 아빠도 수없이 연습해. 네가 이렇게 프리젠테이션 리허설을 하는 것처럼 아빠도 회의에서 발표하기 전에 문장이 입에 익도록 연습을 해. 영어로는 임기응변을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예상 질문도 생각해서 답변을 미리 준비하지.”
“언제까지 이렇게 연습을 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 점점 익숙해지면 연습하는 횟수도 줄어들 거야. 처음에 10번 연습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5번, 2번으로 줄어들겠지. 그래도 너는 아빠보다 빨리 익숙해질 거야.”
이렇게 아이를 위로했다. 사실은 내 자신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1년 정도 살고 나면 아이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외국어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부모가 겪는 어려움을 아이도 똑같이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아닌 이상 2년을 살아도 의사소통은 여전히 큰 숙제다. 1년 정도 지나면 일상 대화를 알아듣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듣기’는 늘지만, ‘말하기’는 연습을 해도 생각처럼 빨리 능숙해지지 않는다. 듣기, 말하기 순서로 발달하는 언어 발달 과정과 똑같다. 듣기는 수동적인 수용으로 끝날 수 있지만 말하기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나 아이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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