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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문화
웅진서가 | 15.06.05 | 조회수 2,628

내가 힘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미국 사람들의 명확한 의사소통 방식 때문이었다. 언어도 언어지만 의사소통을 직접적이고 단순명료하게 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Yes, No부터 넘기 힘든 벽이었다.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 없이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해도 되는데 미국 생활 초반에는 이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멘토나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No.’라고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고,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만큼 한국어의 경어 체계와 완곡어법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 회의에서 “I don’t agree.”, “I don’t think so.”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논문에 대한 공저자들의 논평에서 가장 많이 쓰인 문구는 “It is unclear.”였다. 문장의 뜻이 명확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붙는 말이었다. 그리고 중언부언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논문이어서 특히 그랬는지 몰라도 문장을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쓰는 것부터 훈련을 받았다. 논문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애매모호하고 뭉뚱그리는 말을 하면 상대방 표정부터 바뀌었다. 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는 A를 요청하면 상대방이 연관된 B와 C도 같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것이 상례다. 그래서 요청하는 사람도 알아서 관련된 것을 같이 처리해 주겠지 하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A를 요청하면 A만 알려 준다. 그 A도 최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요청해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냉정한 사회라는 생각도 드는데, 다르게 보면 명확한 의사소통에 기반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피츠버그에 처음 도착해 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I-76 고속도로에서 우리가 살던 지역으로 나가려면 39번 출구로 나가야 했다. 출구 이전에 두 번 정도 39번 출구는 어디로 향한다는 안내가 나오는데, 정작 출구에는 간단하게 Exit 39라고만 쓰여 있었다. 처음 받은 느낌은 ‘이거 참 쿨하군.’이었다. 한국 같으면 출구 몇 백 미터 전부터 안내 표지판이 몇 차례 보이고, 출구에도 친절하게 표지판이 같이 붙어 있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관행적인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전에 충분히 안내를 했으니 불필요한 표지판을 추가할 이유가 없다.

이런 경험을 통해, 차츰 말하고자 하는 뜻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의견을 주면 근거를 달아서 확실히 주장을 했다. 한국에서처럼 “예, 예, 좋은 의견입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이 사회에서 생존하고 적응해 나가는 데 맞지 않는 방식임을 깨달은 것이다. 의사소통이 명확하지 않으면, 의견과 주장이 확실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였다. 부모든 아이든 외국에 나가서 생활하다 보면 직접적인 언어보다는 명확한 의사소통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다른 의사소통 문화에 맞추어 나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부모가 아이가 하는 경험을 비슷하게 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의사소통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혼란과 불안함을 공감하고 잘 보살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해 나갈 것인지를 공유한다면 모두에게 분명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는 부모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안심한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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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웅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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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힘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미국 사람들의 명확한 의사소통 방식 때문이었다. 언어도 언어지만 의사소통을 직접적이고 단순명료하게 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Yes, No부터 넘기 힘든 벽이었다.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 없이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해도 되는데 미국 생활 초반에는 이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멘토나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No.’라고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고,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만큼 한국어의 경어 체계와 완곡어법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 회의에서 “I don’t agree.”, “I don’t think so.”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논문에 대한 공저자들의 논평에서 가장 많이 쓰인 문구는 “It is unclear.”였다. 문장의 뜻이 명확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붙는 말이었다. 그리고 중언부언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논문이어서 특히 그랬는지 몰라도 문장을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쓰는 것부터 훈련을 받았다. 논문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애매모호하고 뭉뚱그리는 말을 하면 상대방 표정부터 바뀌었다. 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는 A를 요청하면 상대방이 연관된 B와 C도 같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것이 상례다. 그래서 요청하는 사람도 알아서 관련된 것을 같이 처리해 주겠지 하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A를 요청하면 A만 알려 준다. 그 A도 최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요청해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냉정한 사회라는 생각도 드는데, 다르게 보면 명확한 의사소통에 기반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피츠버그에 처음 도착해 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I-76 고속도로에서 우리가 살던 지역으로 나가려면 39번 출구로 나가야 했다. 출구 이전에 두 번 정도 39번 출구는 어디로 향한다는 안내가 나오는데, 정작 출구에는 간단하게 Exit 39라고만 쓰여 있었다. 처음 받은 느낌은 ‘이거 참 쿨하군.’이었다. 한국 같으면 출구 몇 백 미터 전부터 안내 표지판이 몇 차례 보이고, 출구에도 친절하게 표지판이 같이 붙어 있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관행적인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전에 충분히 안내를 했으니 불필요한 표지판을 추가할 이유가 없다.

이런 경험을 통해, 차츰 말하고자 하는 뜻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의견을 주면 근거를 달아서 확실히 주장을 했다. 한국에서처럼 “예, 예, 좋은 의견입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이 사회에서 생존하고 적응해 나가는 데 맞지 않는 방식임을 깨달은 것이다. 의사소통이 명확하지 않으면, 의견과 주장이 확실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였다. 부모든 아이든 외국에 나가서 생활하다 보면 직접적인 언어보다는 명확한 의사소통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다른 의사소통 문화에 맞추어 나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부모가 아이가 하는 경험을 비슷하게 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의사소통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혼란과 불안함을 공감하고 잘 보살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해 나갈 것인지를 공유한다면 모두에게 분명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는 부모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안심한다.


*‘아이와 해외연수’는 책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면》(김재원, 김지인 지음/웅진서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합니다. 서울대 소아정신과 교수 아빠와 중2 딸이 2년 동안 미국에 살며, 하나하나 겪고 함께 쓴 아이 적응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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